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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에 대해

그 시초로 돌아가면 동학에서부터 파생된 종교이며, 그 전신은 백 도교이다. 정확히는 1919년 백 도교의 분모인 전정운이 사망한 후 세 아들 사이에 교주로서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 1930년 사망한 전정운은 첩 4명과 일가족 8명을 살해해 암매장했고, 철저하게 짓밟힌다. 이때 무사히 도망친 차남 전용해가 후에 백백교를 재건하게 된다. 백백교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사교인 백백교는 온갖 감언이설로 우매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꾀어 교세를 넓혀나가게 된다.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진 밀교로 신도들을 모아 재산을 모조리 교주에게로 복속시키고, 가난한 신도들의 딸은 자신에게 바치게 하여 첩을 삼는 등의 범죄를 일삼는다. 그러던 중 자신들의 범죄가 드러날까 두려운 교주는 심복 부하 12명에게 지시를 내려 전국적으로 350명의 신도들을 집단으로 살인하게 된다. 이때 우 곤룡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조부가 백백교에 빠지고 그의 누이까지 백백교에게 바쳐지자 이에 백백교를 무너트리겠다 결심한 우곤룡은, 백백교를 찾아가게 된다.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유혹한 뒤 우곤룡은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의 가면을 벗기고는 경찰들을 동원해 백백교를 무너트리는 데 성공한다. 그의 밑에 있던 부하들은 모조리 잡히거나 죽게 되고, 전용하는 도주 후에 자살하게 된다. 하지만 사체의 훼손으로 인하여 정말로 교주가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살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전용하는 같은 날 달아났다가 사라졌다. 얼굴을 보면 기운이 없어 죽는다며 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측근과 가족 외에는 얼굴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않았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들도 함부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16개의 가명을 사용하는 등 매우 꼼꼼했다. 그러던 그가 몇 달 뒤 솔밭에 드러누워 칼로 목을 찌른 채 발견됐지만 얼굴을 먹어 신원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에 새로 외출한 전용 해가 옷을 입고 도주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다만 전용해의 아이가 이를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판단된다.

 

백백교 교주 전용해에 대한 묘사

이대근이 출연한 영화 백백교는 당시 황당한 상상력으로 상당히 내용이 왜곡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백교는 다른 사교에서 보여주는 위험한 프로세스를 답습하게 된다. 백백교는 이러한 종교를 악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치고 결국은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 종교로써의 도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사이비 종교는 종국에는 매우 폭력적으로 변모하게 되고 온갖 진리를 왜곡하여 사람들을 근본적인 사망에 이르게 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교주 전용하는 1937년 수배 당시의 인상착의가 적혀있었다. 그의 사체조차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본모습을 본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기 때문에 그의 인상착의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용하는 키가 167cm 정도로 얼굴이 둥그스름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하얀 편이었고 눈은 크고 빨간색이었으며,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안경을 착용하였으며 뾰족한 코를 지녔고, 매일 면도를 하여 수염을 기르지 않았으며 도주 중에서도 수염은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길었으나 대머리였으며, 왼편으로 가르마를 탔다. 입술에 작은 흉터가 있었고, 검은 조끼, 흰 바지, 검은 로브를 입고 회색 중절모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백백교 뒷이야기

백백교 사건의 종료 이후, 일제는 범죄연구 목적으로 전용해의 머리를 포르말린이 담긴 통에 따로 보관하게 된다. 해방이 후에는 전용해의 머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져 보관되었다. 2004년 백백교의 신도라고 자청하는 사람이 전용해의 머리를 돌려달라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화제가 되어 TV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백백교에 대한 실체가 제조명받기에 이르렀고, 수급 표본이 매스컴을 통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결국에는 2011년 10월 보관 중인 사체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수급 표본은 결국 화장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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